2022 큐슈 산보 4. 유후인 + 벳푸

발을 내딛을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개를 올릴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지붕 위, 담장 아래, 심지어 골목길 바닥 배수로에도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온천의 도시 벳푸다.

동 틀 무렵 긴린코 수면 위에 피어오른 물안개를 보고 유후인에서 벳푸로 넘어왔다. 그런데 이른 아침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유후인의 연기와 달리 벳푸의 연기는 아침, 낮, 밤 시도때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통 하얗게 피어올랐다. 연기에선 은은한 유황 냄새가 났고 몸에 닿으면 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 지옥에 왔구나! 온천 용출량 최고를 자랑하는 벳푸의 지옥마을 간나와다웠다.
펄펄 끓는 8개의 지옥 온천을 둘러보고, 온센타마고(온천찜계란)와 지옥푸딩을 먹고, 온천수도 맛보고, 족욕도 한다. 옆 마을 묘반에 가서 유황온천를 하며 유노하나(온천의 꽃)도 경험해볼 터이다. 그리고 예약해둔 료칸 온천으로 대망의 마무리!
하지만 료칸에 짐을 맡기면서 계획이 조금씩 틀어졌다. 여행 동지가 가벼운 인삿말로 “유황온천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오카미상(여주인)에게 스마트폰의 번역을 건넸고,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일장연설을 시작하였다.
우리 료칸은 3대 째 내려와 150년이 넘었고, 우리 온천이 벳푸 온천의 발상지이고, 우리 온천을 하면 정말 튼튼해질 것이고, 성분은 이러이러한데 표도 보여줄 수 있고, 옆의 사찰도 우리 것이고, 예전에는 무시유(약초찜목욕)도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옆 마을 유황온천은 할 필요가 없으니, 이것을 한국인, 아니 전세계인에게 꼭 알리라는 요지였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듣고 있던 연설이 끝나니 여행 동지의 스마트폰은 흥분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내 마음 역시 불편함으로 범벅이 되었다. 아무래도 오카미상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이 지옥을 지키는 염라대왕이었던 것이다. 제 발로 지옥을 찾아온 것은 집에서부터 준비해간 목욕가방도 챙기지 못한 채 굽신거리며 서둘러 거리로 나섰다. 전혀 통하지 않는 영어와 오로지 번역기로만 하는 일어 대화에 지친 나는 그녀의 호통에 남은 기운마저 빼앗겨 축 쳐져버렸다.
결국 한 번 온천을 하고나면 사나흘간 몸에서 유황냄새가 안 빠진다는 묘반 온천은 구경도 못한 채 6개의 간나와 온천지옥순례만 하고 료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망의 마무리! 료칸에는 예쁜 노천도 있었지만, 날이 추워 실내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낡고 오래되어 너무 추웠다. 탕에 앉아있으니 영어가 능통한 젊은 컨시어지가 있는 따뜻하고 세련된 유후인 호텔 온천이 그리워졌다. 결국 벳부 온천의 효험이 어느 정도인지 경험할 새도 없이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곧 카이세키가 차려졌다. 스시와 사시미, 구운 생선과 소고기와 샐러드, 지옥찜, 밥과 국. 숨도 못 돌린 채 상을 받았는데 계속해서 나오는 요리가 모두 맛있어서 그만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렸다. 덩달아 마음도 스르르 녹고 몸도 노곤노곤해졌다. 밥을 먹고 펴 주신 (사실 보고만 있는 게 불편해 도와서 같이 편) 도톰한 이불에 누워 있으니 어느새 지옥에서 빠져나와 천국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유후인 긴린호수
-간나와 버스터미널
-마사식당: 당고지루, 오야꼬동
-지옥순례: 흰연못지옥, 괴산지옥, 가마솥지옥, 바다지옥, 스님머리지옥
-바다지옥 매점: 온센타마고, 지옥푸딩
-간나와 거리 산책
-샐리가든: 플레인, 말차 쉬폰케이크
-료칸 온천, 가이세키

2022 Kyushu Travel 4. Yuhuin + Beppu

하코카빔

여행, 사진, 책, 별

    이미지 맵

    photo/pm5:55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