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쩍지근해

서촌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촌스럽지 않은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정겹고 아름답고 흔치않은 운치에 반해 몇년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미디어 촬영을 자주 한다. 영화, 광고, 드라마, 교양, 예능 TV 프로그램, 뮤직비디오, 유투브부터 잡지 사진, 웨딩 화보까지.
친구들은 미디어에서 우리 동네가 나온다며 연락을 주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반갑고 뿌듯하다. 내가 아는 서촌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본 것 같아서.

오늘은 영화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제법 규모있는 영화인 것 같다.
며칠 전 , 현관문에 “영화 <달짝지근해> 촬영 협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총 5일동안” 대략적으로 “오후 15시부터 익일 오전 5시까지”. 무려 일주일 가까이되는 날을 밤을 새워 촬영을 하니 “주차 및 통행, 소음과 조명 빛 비침 등 불편”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중히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정해진 사항을 “부득이하게 비대면으로” 남겨 놓은 것이니 통보에 가까웠다.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불편했다. 통보한 촬영시간보다 일찍 어제 정오부터 촬영 준비가 시작되었다. 커다란 촬영 트럭이 십여대 오고 가고, 클랙션 소리를 냈다. 스텝들은 뛰어다니며 큰 소리를 지르거나 통화를 하거나 무전기를 사용했다. 급기야 오늘 오후에는 집 앞에서 촬영을 한다며 수십명이 몰려와 소리를 내며 세팅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물론 이 장면은 모두 집 밖이 아닌 안에서 창문을 통해 본 것이다. (일부러 본 게 아니다. 바로 집 앞이니 눈을 감지 않는 이상 보인다.) 집 안에서 창으로 밖이 보인다면, 밖에서도 창으로 집 안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하러 온 사람들이 집 안을 들여다 볼 일은 없겠지만,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집 앞에 낯선 이들이 있으니 몹시 신경쓰인다. 그것도 표정이 보이고 대화가 들릴만큼 가까운 곳에 이틀내내 밤낮으로 끊임없이 낯선 이가 있다는 것은 신경 쓰이는 것을 넘어 불편한 일이다. 집 안에서도 좀 더 옷을 갖춰 입게 되었고 결국 대낮에도 커튼을 쳤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창문 가까이 물건을 가지러 갈 때 이쪽을 향해 주저앉아 대기하던 스탭들과 눈도 몇 번 마주쳤다.) 하지만 커튼을 쳐도 넘어오는 담배냄새와 소리와 빛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다. 그래서 협조 안내문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대화나 조명이 아닌 잡담(이라는 것은 대화내용이 들리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과 웃음, 흡연은 자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제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촬영 현장을 지나왔다. 아니,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지나왔다. 당연히 그들은 막았다. 그래서 멀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작은 소음도 들어갈 수 있으니 일단 지금 조용히 멈추라고 했다. 기다렸다. 한 씬이 끝나고 그제야 집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받았다.
이 정도면 촬영에 충분히 협조해드린 것 같은데, 어째서 그들은 내 생활에 협조해주지 않는 걸까? 그렇게 작은 발자국 소리에 예민한 분들이 어쩜 이렇게 종일 크게 소음을 내는 걸까? (담배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이곳은 그들이 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일하고, 먹고, 자고, 사는 곳이다.

산책을 나와 촬영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비로소 고요해졌다. 내가 나올 때 그들은 막 집 앞에서 촬영을 시작한다며 소란을 피우던 참이었다.
다녀온 사이에, 다행히 촬영은 옆 골목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들이 떠난 자리엔 빈 물병과 얼음이 담긴 일회용 커피컵 쓰레기만 남아 있었다. (물론 밤인 지금도 차량은 주차되어 있고 조명은 켜져 있고 창문을 약간 비껴난 곳에 사람들이 서 있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늘 낮에 장 뤽 고다르 감독이 떠나간 것을 추모했고, 오징어게임이 에미상 수상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밤엔 프로젝터로 (촬영 조명 때문에 블라인드를 치고) 새 영화를 봤다. 하지만 앞으로 서촌에서 촬영한 영화를 마냥 응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코카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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