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을 살다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합의냐 반대냐. 그러나 이미 확정된 계획이니 동의하라는 겁박이 합의일 수는 없다. 보상이냐 거부냐. 온몸으로 땅을 일구며 서러운 가난을 살아온 사람들을 모욕했다. 새로 세워진 송전탑이 자고 나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울력으로 살던 동네가 부서진다. 한동네 사는 이웃들을 서로 보듬고 싶지만 오만 가지 서운함이 쌓인다. 죽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엇갈려 지나간다. 여자라 서럽지만 여자라 싸우고, 남자라 굳세지만 남자라서 흔들린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싸움을 살아내는 주민들은 격랑에 휩싸인 듯 혼란스럽다. 누군가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자신 안에 이미 죽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일 게다. 송전탑이 빼앗아간 삶에 대한 믿음, 억울하고 원통해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 그/녀들의 한 세계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밀양을 살다’ 중에서

분명 인간의 삶, 생명과 연결된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떤 사건을 신문기사나 뉴스로 접할 땐 하나의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핵. 탈원전. 송전탑 OUT.
단어의 무게만으로 커다란 힘을 가졌지만 서울에 사는 내 피부에 당장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에 피상적인 분노에 그치고 만다.
객관화된 수치와 딱딱한 담론은 목소리가 담긴 구술기록으로 변주될 때 내 이웃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 할매의 노래가 되어 더 깊은 공감과 울림을 준다. 이제야 피부에 닿은 것 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밀양 송전탑 사건이라는 큰 산을 읽었다면 이 책은, 그 안에 있는 다양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가 어떻게 산을 구성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저마다의 싸움을 듣고 있으면 비로소 이것이 한 생명의 싸움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코카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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